제3부 12·12사태의 진상
나는 이렇게 연행됐다
1979년 12월 12일, 한국의 현대사가 크게 한번 요동친 날, 鄭昇和계엄사령관은 金載圭재판에서 사실심리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후4시 그는 全斗煥합수단장을 불렀다.
『제가 합수단장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내일 김재규가 최후진술을 한다는데 그 최후진술에 이런 내용을 좀 넣을 수 없을까. 즉, 우리 국민들이 공산주의자와 불순분자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도록 당부하는 말을 김재규가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대공업무의 총책임자가 죽기 전에 하는 말이니까 대단히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합수단장은, 지금 재판이 진행중인데 우리가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보겠습니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사흘 전인 12월9일은 일요일이었다. 鄭총장은 골프장에서 盧載鉉국방장관과 단 둘이서 만나 全斗煥합수단장의 인사문제를 논의했다. 鄭총장은 『김재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당장 바꾸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盧국방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하여 鄭총장도 그 문제를 일단 보류했다는 것이다. 12일 저녁 7시, 겨울이라 암흑은 빨리 왔다. 한남동에 있는 육군참모총장공관에서 鄭昇和·申有慶부부는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날 장군승진자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에는 鄭총장의 처남인 申모 대령(육사15기)의 이름이 끼여 있었다. 鄭총장의 장모는 그때 앓고 있었다. 鄭총장은 처남의 승진 소식을 알려주어 장모를 기쁘게 해 드릴 생각으로 찾아뵙기로 했던 것이다. 鄭총장 부부의 거실은 2층에 있었다. 나오려는데 텔리비전에서 7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鄭총장은 뉴스를 듣고 나가려 했다. 그때 부관인 李在千소령이 올라오더니 『보안사 처장이 보고하러 왔습니다』고 했다. 李소령은 鄭총장 부부의 외출때 수행하기 위해 1층 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층에서 기다리라고 해! 뉴스 보고 내려갈테니』
뉴스가 끝나자 鄭총장은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순간부터의 진행상황을 鄭昇和씨는 기자에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 증언을 정리해 본다.
「사복한 대령 2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 대령은 국방부조사대장, 다른 대령은 보안사 처장이라고 소개했다(기자주:국방부 조사대장이라는 대령은 우경윤(禹慶允)대령으로서 당시에 육군본부 범죄 수사단장이었고 합수단의 제2국장으로 파견 나가 있었다. 보안사처장이라고 한 대령은 許三守보안사 인사처장).
『그런데 급한 보고가 있다는데 뭔가?』 許대령이 말했다.
『총장님, 김재규한테서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김재규가 그랬나?』
『예, 참고로 진술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녹음도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럼 녹음기 준비됐나?』
『아닙니다. 녹음시설이 돼 있는 저의 부대로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때 나는 퍼뜩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金載圭가 나를 물고 들어갔고, 崔圭夏대통령권한대행이 나를 오해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놈아, 계엄사령관이야!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가겠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 너희들 최규하 대행에게 허가를 받았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왜 연락이 없었나. 어이, 부관! 총리공관에 전화 걸어! 총리가 안 계시면 국방장관을 찾아서 전화를 연결해 줘!』
李在千소령은『예』하면서 현관 왼쪽에 있는 부관실로 뛰어들어 갔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유리창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권총 소리였다. 나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사격중지…』라고 외쳤다. 공관경비병과 합수단 수사관 사이에 총격전에 벌어진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두 대령은 나를 양쪽에서 팔장을 끼더니 『총장님 갑시다』고 일으켜 세웠다.
『그래, 가자!』
내가 일어섰다. 찻잔을 들고 온 당번병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와장창! 현관 창문을 깨고 누가 뛰쳐 들어 왔다. M16을 든 곤색 야전잠바차림의 나이 든 군인이었다. 그는 홀로 뛰어들면서 공포를 몇 방 쏘고는 총구를 내 가슴에 갖다 대 몇번 쿡쿡 쑤셨다. 총구가 내 뺨을 스쳐갔다. 그 군인의 인상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현관 앞에는 그들이 몰고 온 세단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뒷자리에 탔다. 양쪽에 두 수사관들이 동승했다. 공관 정문을 빠져 나가는데 보초병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내가 상부의 명령으로 체포돼 가는 줄 믿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차중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 했다.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崔圭夏대행의 오해가 풀리면 모든게 잘 되겠지 하는 희망을 한 가닥 갖고 있었다」
鄭昇和씨는 연행된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목격자가 못된다. 부인 신유경(申有慶) 여사가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 제가 뛰어내려 갔지요. 저분은 끌려간 뒤였어요. 현관 옆에 있는 부관실로 들어가 보았더니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습디다. 바닥은 피바다였어요. 저는 부관을 찾으러 주방까지 가 보았는데 없어요. 그때 2층에 있는 제 아들 생각이 나서 죽어도 그 아이와 같이 있어야겠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저를 향해 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허겁지겁 올라갔지요. 2층에서 떨고 있다가 조용해진 것 같아 1층으로 내려가 보니까 아주 덩치 큰 사나이가 현관쪽에서 열 십자로 뻗어 있더군요』
「열 십자로 뻗어 있었던 큰 사람」은 鄭총장을 연행하러 왔던 禹慶允 대령이었다. 12·12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문과 盧泰愚민정당 총재의 공개적 발언에 따르면 禹慶允대령은 총장공관 경비대의 총격으로 다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鄭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려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지금, 그 총상을 입은 당사자는 하반신을 못쓰고 있어요』(1985년 4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한 말). 다른 자료에 의하면 鄭총장은 두 대령이 강제연행하려 하자 『헌병!』이라고 외쳤고, 이때 경비대원들이 나타나 禹대령을 떼어놓고 권총을 쏴 하복부가 맞았다는 것이다.
부인이 군수뇌에 연락
이에 대해 鄭昇和씨는
『내가 헌병을 부른 적은 없다. 나는 대통령이 연행허가를 했다고 믿었으니까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禹대령이 총을 맞았다면 내가 끌려간 뒤일 것이다.』
申여사는 『남편이 끌려간 뒤 공관관리장교인 반 준위가 해병대에게 연락을 했다』고 증언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반 준위를 향해 수사관들이 총을 쏴 시멘트기둥을 돌면서 피했답니다. 반 준위는 공관을 뛰쳐 나와 한 길도 넘는 축대를 뛰어내려 공관외곽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원들의 막사에 가서 연락을 취했답니다. 해병대원들이 공관으로 달려 와 그 곳에 남아 있던 수사관과 그들이 데리고 온 병력을 포위해 버렸다고 합디다』
申여사는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고 전화를 돌렸으나 모두 선이 절단돼 불통이었다. 다만 비상전화 한 대가 살아 있었다. 맨 첨 申여사는 연합사 부사령관 柳炳賢 장군 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柳장군은 『제가 즉시 나가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엔 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尹차장도 놀란 말투로 『빨리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盧載鉉국방부장관 집엔 두번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李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의 아내가 받더라고 한다. 申여사의 신고를 받은 육군수뇌부는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이 이후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는 계엄사 발표문과 盧泰愚씨가 한 인터뷰 및 민정당원에 대한 특강을 통해서 그 일면이 공개된바 있다.
盧泰愚씨의 증언
민정당 盧泰愚총재는 인터뷰에서 12·12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가원수를 시해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 김재규라는 사람은 그다지 능력도 없는데 박대통령에 의해 성장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을 시해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함에 있어서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애국 투사나 혁명가인 양 부각시키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군내에도 김재규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습니다.
자칫 수사방향을 오도해서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방향으로 갈 조짐이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 대립되는 듯한 판국이었지요. 만약 이 두 주장이 맞부닥친다면 김일성이가 쳐들어올 수 있는 틈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망쳐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수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셨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그런데 수사가 벽에 부닥쳤습니다. 왜냐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이 박대통령 시해 당시 그 옆방에 와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또 군의 생리를 보았을 때 우리는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이 모든 직책을 다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혹 같이 모의를 한 형사적인 책임은 없다 손치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스스로 져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이런 분이 안 나가고 수사의 방향을 딴 데로 끌고 가려하니까 수사를 공정하게 진행할 수 없었던 거예요. 나는 원래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씨와 친한 사람이었고, 옛날에 그분의 은혜도 입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솔직하게 이런 의견을 계엄사령관에게 건의해서 수사가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존경했던 상관이니까 그분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의 직예를 들면 합참의장 등의 직책을 맡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어, 종국에 가서 군이 어떤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군대가 나온 것은 아니고 몇 사람의 개인이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러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처음부터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닙니다. 포위가 돼서 극히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런 상황으로 몇 시간 동안 해결하려고 노력 했지만 잘 안됐고, 이런 소식이 우리부대까지 알려지고, 거기서 또 연락이 오고 해서 이를 수습할 수 있는 길이 결국 상대방이 힘으로 장악하고 있으니까 힘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수습이 된 거지요』
「납치라며 병력동원」
12·12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는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김재규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정총장의 관련 혐의점이 드러났으며 정이 전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 추종 세력과 계속 회합 연락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돼 즉각 조사할 필요가 있었으나 국민의 충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김재규 일당 및 추종세력의 반발에 의한 정국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어 대통령 선거후 정국안정 때까지 수사를 미루어 왔다. 정총장이 스스로 깨닫고 양심에 따라 용퇴할 것을 기대했으나 그런 기미가 없고,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월권이 계속돼 조사를 단행키 위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정이 육군총장으로서 군령권의 즉각적인 행사가 불가능한 일과 시간 후에 총장 공관에 체재중 조용히 연행키 위해 12월12일 오후 7시 수사관들이 총장 공관으로 갔다. 수사관들은 자발적으로 출두, 수사에 협조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정총장이 동행을 거부하고 소리를 지르자 경호병들이 즉각 사격을 시작해 공관 경비병과 수사관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 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역시 김재규 범해에 관련혐의가 있어 조사하려던 중 이들이 정총장 연행 사실을 알고 휘하조직을 이용, 정총장의 연행을 납치라며 동조자를 규합, 병력을 출동시키고 전차 등 장비를 동원, 무력으로 수사를 거부했다. 이 사태가 발전되면 단순한 저항이 아니고 국가 안녕질서가 파괴되는 사태로 확대될 것이 우려돼 계엄군이 증원 추가배치돼 추종분자들을 검거했다」
발표문은 또 이날 밤의 총격전으로 사망 3명, 중상 4명, 경상 16명 등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은 이밖에 「이건영 전 3군사령관은 12·12사건 때는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문홍구 전 합참본부장 등과 연락을 취하며 병력을 출동시켜 저항을 했다」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은 정총장을 구출한다고 전차부대 및 병력을 출동케 하고 발포 명령을 내리는 등 저항을 했다」 「문홍구 전 합참본부장은 수경사로 가 장태완과 같이 추종 세력의 단합과 저항을 선동했다」고 했다.
육군본부가 전군에 비상을 걸었고 이에 따라 張泰玩수도경비사령관과 鄭炳宙특전사령관 총장의 측근인 이 두 장군은 그날 밤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뒤늦게 사령부로 돌아갔기 때문에 부대 장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육군본부에선 尹誠敏차장 등이 지휘를 하다가 수경사령부로 옮겼다.
鄭昇和씨는 『비상시에 지휘부가 육본벙커를 포기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실책이다』고 했다. 육본, 수경사, 특전사의 수뇌부는 합수단을 겨냥하여 군병력을 동원했고, 합수단 부근의 모 부대에서는 또다른군 고위 장성들이 모여 합수단측에 서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며, 이들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총장공관에선 鄭총장을 연행하러 갔던 합수단 병력이 해병대 경비대에 의해 포위되고, 그 바깥에는 합수단병력을 구출하러 간 병력이 포진하는 등 뒤어킨 상태에서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다.
육군본부와 수경사측에서 동원한 병력이 시내로 접근하고 있는 도중에 합수단측의 공수여단이 먼저 시내로 들어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거의 동시에 수경사에선 자체 헌병단 병력이, 특전사에선 사령관 예하 부대가 내부행동을 개시, 수경사령관과 특전 사령관 등을 체포, 연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육본작전참모부장 河小坤소장과 특전사령관 鄭炳宙소장은 부하들로 부터 총격을 받아 크게 다쳤고, 鄭소장의 비서실장인 金모 소령은 鄭소장을 보호하다가 피격돼 숨졌다. 수경사에 지휘부를 설치했던 육군본부 군 수뇌부도 무력화되었다. 이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는 李희성 장군이, 수경사령관에는 盧泰愚소장이, 특전사령관에는 鄭鎬溶소장이 임명되었다.
바보라는 욕은 들었지만 후회 없다
鄭昇和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수사기관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수사관들이 나를 신문실로 데려가려고 합디다. 제가 고함을 질렀어요. 나는 육군참모총장이다. 총장으로서는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없어. 그러니 종이를 가져와! 사표를 쓰겠어라고 했으나…. 적어도 참모총장을 조사하려면 합수단이 아닌 별도의 고위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유당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왜 이런가, 생각했습니다』
『임명직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임명권자가 버리면 그만이더군요. 국방부장관과 대통령권한 대행이 연행을 추인해 버리니 나는 아무 힘도 없는 억울한 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바보라고 욕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 욕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줄 압니다. 12·12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과, 이왕 그럴 바에야 네가 권력을 잡아버리지 왜 빼앗겼나 하는 비난이 그것인데, 저는 그때 쿠데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군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바라고 있었고, 어느 한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다른 부대가 절대로 호응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쿠데타 모의에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보고를 해야 할 사람들이 당사자였으니까….』
鄭昇和씨와 인터뷰를 시작한 둘째 날 그는 자신이 「역사의 패배자」란 평가를 (나로부터)받은 데 대해서 직설적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 늙은 아버지를 패배자라고 욕하면, 욕하는 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그런 자식을 둔 점에서 아버지의 도덕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그들과 정권 경쟁을 하려다가 패배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군의 중립성을 지키려다가 나의 임무가 중지된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수법을 동원하여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졌다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패배자의 길을 택해야지요. 저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재주가 아니라 정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李厚洛 출국허가의 배경
鄭昇和씨는 金載圭의 내란기도를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합수단과 군검찰측에서는 鄭씨가 10·26 뒤 합수단에 구속된 李在田경호실 차장을 풀어준 사실과 李厚洛씨의 출국을 허가한 사실 및 金載圭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 등을 기소장·발표문 등을 통해 공개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은 우리나라의 법이 보장하는 반론권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옮겨본다.
『李在田차장이 10·26사건 당일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합수단에서 일단 구속수사를 하겠다기에 허락을 했어요. 柳炳賢, 金鍾煥장군 등도 李차장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염려해 주었습니다. 합수단에서 올린 범죄보고서를 보니까 직무유기로 몰았는데 무리가 많았어요. 車실장이 사고를 당한 줄 알고도 차장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정보부를 습격하지도 않는 등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제가 수사책임자에게 말했어요. 여보, 李차장이 얼마나 잘 했오. 무슨 좋은 일이라고 부하들에게 사고를 다 털어놓겠소. 정보부를 습격한다는 것도 감정적인 대응밖에 더 돼오. 그것도 내 판단대로 하지 않고 법무감의 전문적인 의견을 구한 뒤 기소각하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 정권이 그 뒤 李在田씨를 성업공사 사장으로 중용하지 않았오. 李厚洛씨는 그때 무슨 국제불교대회에 참석하려고 여권신청을 했는데 합수단에서 발급을 보류시켰어요. 위장출국인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李씨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이번 출국은 그 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면서 선처를 요청했어요. 제가 국방장관과 상의해 보니 李씨와 같은 사람에 대한 출국규제의 방침이 정부에는 없다는 걸 확인했어요. 더구나 당시엔 그가 수사대상자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출국시킨 것입니다.
그가 출국한 뒤 귀국이 늦어진 것은 12·12사태로 내가 제거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金載圭당시정보부장이 1979년 10월 추석 전에 사람을 저한테 보내 「중추가절」이라고 적힌 봉투를 주고 간 적이 있었어요. 뜯어보니 10만원짜리 수표 30장이었습니다.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 두었습니다. 10·26 뒤 金載圭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밝혀졌어요. 합수단장이 보고한 리스트에 저의 이름은 빠져 있기에 「나한테 3백만 원 준 것은 말하지 않던가?」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진술하기는 했습니다」고 하더군요』
막내 아들은 육군 대위
기자는 다시 한번 『정말 金載圭와는 관련이 없었읍니까』하고 다짐하듯 물어보았다.
『육본벙커에서 그와 헤어진 뒤에는 한번도 만나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김재규는 육본 벙커에서 손님처럼 행동했어요. 그는 시해 뒤의 행동계획이 아무것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김재규 눈치를 본 것처럼 이야기한 사람이 있는데, 그자가 내 눈치를 보았으면 보았지 왜 내가 눈치를 봐! 10·26 밤에 제가 취한 조치는 모두 적절했습니다. 김재규 체포를 지휘한 것, 군 병력의 신속한 배치 등 위기관리는 완벽했었다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법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저는 27일 새벽 4시에 계엄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민간인 金載圭를 체포할 책임이 내무나 법무장관에게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장관들 중에는, 제가 밤 11시 30분쯤 金桂元 비서실장으로부터 귀뜸을 받기 훨씬 이전에, 그러니까 밤 9시쯤부터 金載圭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어요』
鄭昇和피고인은 내란방조죄로 구속기소되어 1980년 3월13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구형은15년). 周永福국방부장관은 그달 18일 관할관의 형량확인과정에서 징역 7년으로 감형시켰고 鄭피고인은 항소를 포기, 형이 확정되었다. 鄭씨는 군 교도소의 독방에서 일반 사병 죄수와 꼭 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1980년 6월10일 鄭씨는 옥살이 6개월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몸무게가 9kg이 줄어 출옥할때는 59kg이었다. 다음해 3월에는 사면·복권되었다. 3남1녀를 둔 鄭씨의 막내아들(29세)은 지금 육군대위로서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다. 鄭씨가 출옥한 해에 이 아들은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鄭씨는 아들에게 『괴로우면 퇴교하라』고 권고했으나 아들은 군인의 길을 계속 걷겠다고 하더란 것이다. 나머지 두 아들과 한 사위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의외로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鄭씨는 『감옥을 나온 뒤 인생을 많이 배우며 살고 있다. 다행히 우리 가정이 화목하여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동사무소, 전화국 등 민원창구를 직접 출입하면서 주민증도 떼 보고 전화신청도 했다. 아들뻘되는 전화국 공무원에게 반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운전면허도 새로 내 로얄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친구들과 군의 선·후배들도 자주 만나지만 국립묘지 등 공식적인 모임이나 장소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12·12때 수령사령관 張泰玩씨(56)는 1980년에 예편당한 뒤 한국증권전산(주)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나 12·12 때 팔에 총상을 입은 당시 특전사령관 鄭炳宙씨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고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연금 못 받은 군인 32년
12·12 뒤 일부에서는 鄭昇和씨가 무능한 군 지휘관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말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이들은 6·25때 鄭昇和씨를 부하(대대장 혹은 부연대장급)로 썼던 퇴역장성들이었다. 柳陽洙씨(동아그룹 부회장)는 『전투중 어려운 임무는 鄭昇和씨에게 맡기곤 했는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6·25때 8연대의 부대대장이던 鄭대위는 초전의 대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대대를 체계있게 지휘, 장비와 인원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광나루에서 도강, 전사에도 기록돼 있다. 6·25 중에는 공비토벌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6·25 중에는 유명한 백골부대의 대대장으로서 낙동강 전선에서 두만강까지를 누비며 수십번이나 사선을 넘었다.
그는 훈장없는 장교로 유명했다. 『훈장을 타 가라는 증서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비에 젖었기에 다 찢어 버렸다』고 한다. 鄭씨는 자기 자랑에는 좀 서툰 인상을 준다. 기자가 일부러 자랑거리를 찾아 물어도 계면쩍어 하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명령없이 진지를 포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자랑을 했다. 그는 『전쟁을 해보면 평소에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용감하고 평소에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쁘더라』면서 『정치장교들이 전장에서 과연 소용이 있을까』라고 했다. 金昌龍, 元容德 등 이 나라의 유명한 정치장교들이 한결같이 전선을 피해 후방에서 권부의 주변만 맴돈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鄭장군은 부군단장 시절 군단장인 韓信장군과 함께 휴전선의 철책을 고안한 업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鄭씨는 자기 자랑 대신『내가 모셨던 상관들―韓信 임충식(任忠植) 金鍾五장군 등이 모두 잘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한다. 1947년부터 시작된 그의 군생활은 1979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군생활 만32년(전시3년 포함)에 대한 연금혜택을 그는 받지 못하고 있다. 실형선고를 받아 군적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李희성, 尹誠敏 국방부 장관시절에 『현행법상으로는 할 수 없으니 최대한 배려하여 3분의 1을 받도록 하겠다』는 연락이 왔으나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鄭昇和씨의 사진은 지금 자신이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부대에서조차 제거되고 없다고 한다. 『내가 육군참모총장 시절에는 張都暎장군의 사진도 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순수군인이 많다
그래도 그는 기자와 헤어질 때 군인옹호론을 열심히 폈다.
『저는 국민과 군인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이 관계도 개선되겠지요. 저는 일부 정치군인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이고 대다수 군인들은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괴가 남침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장교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도 순수군인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국민과 군의 친선관계는 남북통일 이후에까지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관계입니다. 통일이 된 뒤에도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해가려면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장교의 신분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도 필요합니다. 장교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그의 평생을, 그리고 유사시에는 그의 생명을 국가에 담보한 사람들입니다. 제대한 뒤에도 예비역으로 남아 전쟁이 터지면 국가는 그들의 봉사를 다시 요구하게 됩니다. 장교가 무조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대신에 국가는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군도 사회를 알고 사회도 군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군이 국민을 지배하겠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군은 국민 품에 안길 때 편안합니다. 지난 6월 사태 때 우리 군이 취한 태도에서 그런 희망을 봅니다』
나는 이렇게 연행됐다
1979년 12월 12일, 한국의 현대사가 크게 한번 요동친 날, 鄭昇和계엄사령관은 金載圭재판에서 사실심리가 모두 끝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오후4시 그는 全斗煥합수단장을 불렀다.
『제가 합수단장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내일 김재규가 최후진술을 한다는데 그 최후진술에 이런 내용을 좀 넣을 수 없을까. 즉, 우리 국민들이 공산주의자와 불순분자들에 대한 경계를 풀지 않도록 당부하는 말을 김재규가 좀 해주었으면 좋겠어. 대공업무의 총책임자가 죽기 전에 하는 말이니까 대단히 효과가 있을 것 같은데. 합수단장은, 지금 재판이 진행중인데 우리가 그런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매우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나 노력은 해보겠습니다고 하더군요』
그보다 사흘 전인 12월9일은 일요일이었다. 鄭총장은 골프장에서 盧載鉉국방장관과 단 둘이서 만나 全斗煥합수단장의 인사문제를 논의했다. 鄭총장은 『김재규 재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려 했는데 당장 바꾸었으면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盧국방은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자고 하여 鄭총장도 그 문제를 일단 보류했다는 것이다. 12일 저녁 7시, 겨울이라 암흑은 빨리 왔다. 한남동에 있는 육군참모총장공관에서 鄭昇和·申有慶부부는 외출복으로 갈아 입었다. 그날 장군승진자들의 명단이 발표되었다.
그 명단에는 鄭총장의 처남인 申모 대령(육사15기)의 이름이 끼여 있었다. 鄭총장의 장모는 그때 앓고 있었다. 鄭총장은 처남의 승진 소식을 알려주어 장모를 기쁘게 해 드릴 생각으로 찾아뵙기로 했던 것이다. 鄭총장 부부의 거실은 2층에 있었다. 나오려는데 텔리비전에서 7시 뉴스가 시작되었다. 鄭총장은 뉴스를 듣고 나가려 했다. 그때 부관인 李在千소령이 올라오더니 『보안사 처장이 보고하러 왔습니다』고 했다. 李소령은 鄭총장 부부의 외출때 수행하기 위해 1층 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1층에서 기다리라고 해! 뉴스 보고 내려갈테니』
뉴스가 끝나자 鄭총장은 1층으로 내려갔다.
이 순간부터의 진행상황을 鄭昇和씨는 기자에게 생생하게 묘사했다. 그 증언을 정리해 본다.
「사복한 대령 2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낯이 익지 않은 사람들이었다. 한 대령은 국방부조사대장, 다른 대령은 보안사 처장이라고 소개했다(기자주:국방부 조사대장이라는 대령은 우경윤(禹慶允)대령으로서 당시에 육군본부 범죄 수사단장이었고 합수단의 제2국장으로 파견 나가 있었다. 보안사처장이라고 한 대령은 許三守보안사 인사처장).
『그런데 급한 보고가 있다는데 뭔가?』 許대령이 말했다.
『총장님, 김재규한테서 돈을 많이 받으셨더군요』
『김재규가 그랬나?』
『예, 참고로 진술을 좀 해주셔야겠습니다. 녹음도 해야겠습니다』
『그래? 그럼 녹음기 준비됐나?』
『아닙니다. 녹음시설이 돼 있는 저의 부대로 좀 가 주셔야겠습니다』 이때 나는 퍼뜩 뭔가 오해가 생겼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金載圭가 나를 물고 들어갔고, 崔圭夏대통령권한대행이 나를 오해하게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 것이다.
『내가 이놈아, 계엄사령관이야! 내가 어떻게 거기로 가겠나. 버르장머리 없는 놈들 같으니. 너희들 최규하 대행에게 허가를 받았나?』
『윤허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나한테 왜 연락이 없었나. 어이, 부관! 총리공관에 전화 걸어! 총리가 안 계시면 국방장관을 찾아서 전화를 연결해 줘!』
李在千소령은『예』하면서 현관 왼쪽에 있는 부관실로 뛰어들어 갔다. 그 순간 총성이 울렸다. 유리창은 깨지는 소리도 들렸다. 권총 소리였다. 나는 불상사를 막으려고 『사격중지…』라고 외쳤다. 공관경비병과 합수단 수사관 사이에 총격전에 벌어진 것으로 오해했던 것이다. 두 대령은 나를 양쪽에서 팔장을 끼더니 『총장님 갑시다』고 일으켜 세웠다.
『그래, 가자!』
내가 일어섰다. 찻잔을 들고 온 당번병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와장창! 현관 창문을 깨고 누가 뛰쳐 들어 왔다. M16을 든 곤색 야전잠바차림의 나이 든 군인이었다. 그는 홀로 뛰어들면서 공포를 몇 방 쏘고는 총구를 내 가슴에 갖다 대 몇번 쿡쿡 쑤셨다. 총구가 내 뺨을 스쳐갔다. 그 군인의 인상은 나의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도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현관 앞에는 그들이 몰고 온 세단차가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뒷자리에 탔다. 양쪽에 두 수사관들이 동승했다. 공관 정문을 빠져 나가는데 보초병은 그냥 서 있기만 했다. 내가 상부의 명령으로 체포돼 가는 줄 믿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차중에서 나는 만감이 교차 했다. 그때까지도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판단을 못하고 있었다. 崔圭夏대행의 오해가 풀리면 모든게 잘 되겠지 하는 희망을 한 가닥 갖고 있었다」
鄭昇和씨는 연행된 뒤의 상황에 대해서는 목격자가 못된다. 부인 신유경(申有慶) 여사가 그 뒤의 일을 이렇게 증언했다.
『아래층에서 총소리가 들려 제가 뛰어내려 갔지요. 저분은 끌려간 뒤였어요. 현관 옆에 있는 부관실로 들어가 보았더니 책상 위에 있던 전화기가 덜렁덜렁 매달려 있습디다. 바닥은 피바다였어요. 저는 부관을 찾으러 주방까지 가 보았는데 없어요. 그때 2층에 있는 제 아들 생각이 나서 죽어도 그 아이와 같이 있어야겠다고 계단을 올라가는데 총소리가 났어요. 저를 향해 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허겁지겁 올라갔지요. 2층에서 떨고 있다가 조용해진 것 같아 1층으로 내려가 보니까 아주 덩치 큰 사나이가 현관쪽에서 열 십자로 뻗어 있더군요』
「열 십자로 뻗어 있었던 큰 사람」은 鄭총장을 연행하러 왔던 禹慶允 대령이었다. 12·12사태에 대한 계엄사 발표문과 盧泰愚민정당 총재의 공개적 발언에 따르면 禹慶允대령은 총장공관 경비대의 총격으로 다쳤다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鄭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려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지금, 그 총상을 입은 당사자는 하반신을 못쓰고 있어요』(1985년 4월호 신동아 인터뷰에서 盧泰愚 당시 민정당 대표가 한 말). 다른 자료에 의하면 鄭총장은 두 대령이 강제연행하려 하자 『헌병!』이라고 외쳤고, 이때 경비대원들이 나타나 禹대령을 떼어놓고 권총을 쏴 하복부가 맞았다는 것이다.
부인이 군수뇌에 연락
이에 대해 鄭昇和씨는
『내가 헌병을 부른 적은 없다. 나는 대통령이 연행허가를 했다고 믿었으니까 감히 저항할 생각을 못한 것이다. 禹대령이 총을 맞았다면 내가 끌려간 뒤일 것이다.』
申여사는 『남편이 끌려간 뒤 공관관리장교인 반 준위가 해병대에게 연락을 했다』고 증언한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요, 반 준위를 향해 수사관들이 총을 쏴 시멘트기둥을 돌면서 피했답니다. 반 준위는 공관을 뛰쳐 나와 한 길도 넘는 축대를 뛰어내려 공관외곽경비를 맡고 있는 해병대원들의 막사에 가서 연락을 취했답니다. 해병대원들이 공관으로 달려 와 그 곳에 남아 있던 수사관과 그들이 데리고 온 병력을 포위해 버렸다고 합디다』
申여사는 외부와 연락을 취하려고 전화를 돌렸으나 모두 선이 절단돼 불통이었다. 다만 비상전화 한 대가 살아 있었다. 맨 첨 申여사는 연합사 부사령관 柳炳賢 장군 집에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柳장군은 『제가 즉시 나가서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 다음엔 尹誠敏 육군참모차장 집에 전화를 걸었다. 尹차장도 놀란 말투로 『빨리 대책을 세우겠다』고 했다. 盧載鉉국방부장관 집엔 두번 전화를 걸었으나 통화가 되지 않았다. 李희성 중앙정보부장서리 집에 전화를 걸었더니 그의 아내가 받더라고 한다. 申여사의 신고를 받은 육군수뇌부는 전군에 비상을 발령했다. 이 이후에 일어난 상황에 대해서는 계엄사 발표문과 盧泰愚씨가 한 인터뷰 및 민정당원에 대한 특강을 통해서 그 일면이 공개된바 있다.
盧泰愚씨의 증언
민정당 盧泰愚총재는 인터뷰에서 12·12사건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국가원수를 시해한다는 것은 어떤 명분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거기다 김재규라는 사람은 그다지 능력도 없는데 박대통령에 의해 성장이 되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의 아버지와도 같은 사람을 시해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로도 용납될 수 없는 일이지요. 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수사를 진행하고 재판함에 있어서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일각에서는 김재규가 애국 투사나 혁명가인 양 부각시키려는 사람이 나오기 시작했고, 또 군내에도 김재규를 추종하는 일부 세력이 있었습니다.
자칫 수사방향을 오도해서 김재규가 영웅이라는 방향으로 갈 조짐이 보이는가 하면 또 한편에서는 그에 반대하는 세력도 있어 대립되는 듯한 판국이었지요. 만약 이 두 주장이 맞부닥친다면 김일성이가 쳐들어올 수 있는 틈을 줄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나라는 망쳐버린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지만 수사에 공정을 기하기 위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이셨던 전두환 대통령 각하께서는 온갖 심혈을 기울였던 겁니다.
그런데 수사가 벽에 부닥쳤습니다. 왜냐하면 합동수사본부장의 상관인 계엄사령관이 박대통령 시해 당시 그 옆방에 와 있었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수사를 진척시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양을 보고 또 군의 생리를 보았을 때 우리는 계엄사령관인 참모총장이 모든 직책을 다 내놔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설혹 같이 모의를 한 형사적인 책임은 없다 손치더라도 도의적 책임을 스스로 져야 마땅하다는 거지요.
이런 분이 안 나가고 수사의 방향을 딴 데로 끌고 가려하니까 수사를 공정하게 진행할 수 없었던 거예요. 나는 원래 계엄사령관인 정승화씨와 친한 사람이었고, 옛날에 그분의 은혜도 입은 적이 있어요. 그러나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솔직하게 이런 의견을 계엄사령관에게 건의해서 수사가 올바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에 합의했습니다. 존경했던 상관이니까 그분을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은 참모총장, 계엄사령관 등의 직예를 들면 합참의장 등의 직책을 맡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수사가 공정하게 진행되어, 종국에 가서 군이 어떤 불행한 사태에 직면하지 않게끔 미연에 방지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군대가 나온 것은 아니고 몇 사람의 개인이 나선 것이지요. 그런데 불행하게도 정총장을 모시러 간 사람을 총장 공관 경비대가 총격을 가해 쓰러뜨렸어요. 그것이 발단이 된 겁니다. 그리고 본인이 처음부터 병력을 동원한 것은 아닙니다. 포위가 돼서 극히 위험한 지경에 놓여 있었는데, 그런 상황으로 몇 시간 동안 해결하려고 노력 했지만 잘 안됐고, 이런 소식이 우리부대까지 알려지고, 거기서 또 연락이 오고 해서 이를 수습할 수 있는 길이 결국 상대방이 힘으로 장악하고 있으니까 힘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서 병력이 동원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건이 수습이 된 거지요』
「납치라며 병력동원」
12·12사건에 대한 국방부의 발표는 사건의 경위에 대하여 이렇게 밝혔다.
「김재규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정총장의 관련 혐의점이 드러났으며 정이 전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 추종 세력과 계속 회합 연락하는 등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포착돼 즉각 조사할 필요가 있었으나 국민의 충격이 사라지기도 전에 김재규 일당 및 추종세력의 반발에 의한 정국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어 대통령 선거후 정국안정 때까지 수사를 미루어 왔다. 정총장이 스스로 깨닫고 양심에 따라 용퇴할 것을 기대했으나 그런 기미가 없고, 계엄사령관으로서의 월권이 계속돼 조사를 단행키 위하여 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정이 육군총장으로서 군령권의 즉각적인 행사가 불가능한 일과 시간 후에 총장 공관에 체재중 조용히 연행키 위해 12월12일 오후 7시 수사관들이 총장 공관으로 갔다. 수사관들은 자발적으로 출두, 수사에 협조해줄것을 요구했으나 정총장이 동행을 거부하고 소리를 지르자 경호병들이 즉각 사격을 시작해 공관 경비병과 수사관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졌다. 전 3군사령관 이건영, 전 특전사령관 정병주 등도 역시 김재규 범해에 관련혐의가 있어 조사하려던 중 이들이 정총장 연행 사실을 알고 휘하조직을 이용, 정총장의 연행을 납치라며 동조자를 규합, 병력을 출동시키고 전차 등 장비를 동원, 무력으로 수사를 거부했다. 이 사태가 발전되면 단순한 저항이 아니고 국가 안녕질서가 파괴되는 사태로 확대될 것이 우려돼 계엄군이 증원 추가배치돼 추종분자들을 검거했다」
발표문은 또 이날 밤의 총격전으로 사망 3명, 중상 4명, 경상 16명 등 2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발표문은 이밖에 「이건영 전 3군사령관은 12·12사건 때는 수경사령관 등과 연락하면서 병력 동원 등 조직적인 저항을 기도했다」 「정병주 전 특전사령관은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 문홍구 전 합참본부장 등과 연락을 취하며 병력을 출동시켜 저항을 했다」 「장태완 전 수경사령관은 정총장을 구출한다고 전차부대 및 병력을 출동케 하고 발포 명령을 내리는 등 저항을 했다」 「문홍구 전 합참본부장은 수경사로 가 장태완과 같이 추종 세력의 단합과 저항을 선동했다」고 했다.
육군본부가 전군에 비상을 걸었고 이에 따라 張泰玩수도경비사령관과 鄭炳宙특전사령관 총장의 측근인 이 두 장군은 그날 밤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가 뒤늦게 사령부로 돌아갔기 때문에 부대 장악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육군본부에선 尹誠敏차장 등이 지휘를 하다가 수경사령부로 옮겼다.
鄭昇和씨는 『비상시에 지휘부가 육본벙커를 포기한 것은 있을 수 없는 실책이다』고 했다. 육본, 수경사, 특전사의 수뇌부는 합수단을 겨냥하여 군병력을 동원했고, 합수단 부근의 모 부대에서는 또다른군 고위 장성들이 모여 합수단측에 서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으며, 이들도 병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총장공관에선 鄭총장을 연행하러 갔던 합수단 병력이 해병대 경비대에 의해 포위되고, 그 바깥에는 합수단병력을 구출하러 간 병력이 포진하는 등 뒤어킨 상태에서 산발적인 총격전이 있었다.
육군본부와 수경사측에서 동원한 병력이 시내로 접근하고 있는 도중에 합수단측의 공수여단이 먼저 시내로 들어와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장악했다. 거의 동시에 수경사에선 자체 헌병단 병력이, 특전사에선 사령관 예하 부대가 내부행동을 개시, 수경사령관과 특전 사령관 등을 체포, 연행했다. 이런 과정에서 육본작전참모부장 河小坤소장과 특전사령관 鄭炳宙소장은 부하들로 부터 총격을 받아 크게 다쳤고, 鄭소장의 비서실장인 金모 소령은 鄭소장을 보호하다가 피격돼 숨졌다. 수경사에 지휘부를 설치했던 육군본부 군 수뇌부도 무력화되었다. 이날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는 李희성 장군이, 수경사령관에는 盧泰愚소장이, 특전사령관에는 鄭鎬溶소장이 임명되었다.
바보라는 욕은 들었지만 후회 없다
鄭昇和씨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수사기관에 도착한 다음날 아침에 수사관들이 나를 신문실로 데려가려고 합디다. 제가 고함을 질렀어요. 나는 육군참모총장이다. 총장으로서는 그런 대우를 받을 수 없어. 그러니 종이를 가져와! 사표를 쓰겠어라고 했으나…. 적어도 참모총장을 조사하려면 합수단이 아닌 별도의 고위 조사위원회를 만들어야 합니다. 자유당 때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는 더 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민족이 왜 이런가, 생각했습니다』
『임명직의 비애를 느꼈습니다. 임명권자가 버리면 그만이더군요. 국방부장관과 대통령권한 대행이 연행을 추인해 버리니 나는 아무 힘도 없는 억울한 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저를 바보라고 욕하는 친구들도 있습니다. 그 욕에는 두 가지 뜻이 있는 줄 압니다. 12·12를 막지 못한 것에 대한 비난과, 이왕 그럴 바에야 네가 권력을 잡아버리지 왜 빼앗겼나 하는 비난이 그것인데, 저는 그때 쿠데타는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군의 여론이 압도적으로 정치적 중립을 바라고 있었고, 어느 한 부대가 반란을 일으키더라도 다른 부대가 절대로 호응을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습니다. 쿠데타 모의에 관련된 아무런 정보도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런 보고를 해야 할 사람들이 당사자였으니까….』
鄭昇和씨와 인터뷰를 시작한 둘째 날 그는 자신이 「역사의 패배자」란 평가를 (나로부터)받은 데 대해서 직설적이 아닌 우회적인 방법으로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늙은 아버지가 젊은 아들에게 두들겨 맞았을 때 늙은 아버지를 패배자라고 욕하면, 욕하는 사람은 도대체 뭡니까. 그런 자식을 둔 점에서 아버지의 도덕적 책임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그들과 정권 경쟁을 하려다가 패배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군의 중립성을 지키려다가 나의 임무가 중지된 것입니다. 그들과 같은 수법을 동원하여 대항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졌다면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들과 같은 사람이 되기보다는 패배자의 길을 택해야지요. 저는 이 나라의 지도자가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덕목은 재주가 아니라 정직성이라고 생각합니다』
李厚洛 출국허가의 배경
鄭昇和씨는 金載圭의 내란기도를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다. 합수단과 군검찰측에서는 鄭씨가 10·26 뒤 합수단에 구속된 李在田경호실 차장을 풀어준 사실과 李厚洛씨의 출국을 허가한 사실 및 金載圭로부터 금품을 받은 사실 등을 기소장·발표문 등을 통해 공개하였다. 이 문제에 대한 당사자의 해명은 우리나라의 법이 보장하는 반론권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옮겨본다.
『李在田차장이 10·26사건 당일 큰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나 합수단에서 일단 구속수사를 하겠다기에 허락을 했어요. 柳炳賢, 金鍾煥장군 등도 李차장이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염려해 주었습니다. 합수단에서 올린 범죄보고서를 보니까 직무유기로 몰았는데 무리가 많았어요. 車실장이 사고를 당한 줄 알고도 차장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고, 정보부를 습격하지도 않는 등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제가 수사책임자에게 말했어요. 여보, 李차장이 얼마나 잘 했오. 무슨 좋은 일이라고 부하들에게 사고를 다 털어놓겠소. 정보부를 습격한다는 것도 감정적인 대응밖에 더 돼오. 그것도 내 판단대로 하지 않고 법무감의 전문적인 의견을 구한 뒤 기소각하 결정을 내린 것입니다.
이 정권이 그 뒤 李在田씨를 성업공사 사장으로 중용하지 않았오. 李厚洛씨는 그때 무슨 국제불교대회에 참석하려고 여권신청을 했는데 합수단에서 발급을 보류시켰어요. 위장출국인 것 같다는 얘기였어요. 李씨가 나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이번 출국은 그 전부터 예정돼 있었던 것이라면서 선처를 요청했어요. 제가 국방장관과 상의해 보니 李씨와 같은 사람에 대한 출국규제의 방침이 정부에는 없다는 걸 확인했어요. 더구나 당시엔 그가 수사대상자도 아니었어요. 그래서 출국시킨 것입니다.
그가 출국한 뒤 귀국이 늦어진 것은 12·12사태로 내가 제거된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金載圭당시정보부장이 1979년 10월 추석 전에 사람을 저한테 보내 「중추가절」이라고 적힌 봉투를 주고 간 적이 있었어요. 뜯어보니 10만원짜리 수표 30장이었습니다. 의례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받아 두었습니다. 10·26 뒤 金載圭에 대한 수사과정에서 밝혀졌어요. 합수단장이 보고한 리스트에 저의 이름은 빠져 있기에 「나한테 3백만 원 준 것은 말하지 않던가?」라고 물었더니 「그렇게 진술하기는 했습니다」고 하더군요』
막내 아들은 육군 대위
기자는 다시 한번 『정말 金載圭와는 관련이 없었읍니까』하고 다짐하듯 물어보았다.
『육본벙커에서 그와 헤어진 뒤에는 한번도 만나 이야기한 적이 없어요. 김재규는 육본 벙커에서 손님처럼 행동했어요. 그는 시해 뒤의 행동계획이 아무것도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내가 김재규 눈치를 본 것처럼 이야기한 사람이 있는데, 그자가 내 눈치를 보았으면 보았지 왜 내가 눈치를 봐! 10·26 밤에 제가 취한 조치는 모두 적절했습니다. 김재규 체포를 지휘한 것, 군 병력의 신속한 배치 등 위기관리는 완벽했었다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법률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저는 27일 새벽 4시에 계엄사령관이 되었습니다. 그 전에는 민간인 金載圭를 체포할 책임이 내무나 법무장관에게 있었던 겁니다. 더구나 장관들 중에는, 제가 밤 11시 30분쯤 金桂元 비서실장으로부터 귀뜸을 받기 훨씬 이전에, 그러니까 밤 9시쯤부터 金載圭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이들이 있었고, 이들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고 나에게 이야기도 해주지 않았어요』
鄭昇和피고인은 내란방조죄로 구속기소되어 1980년 3월13일 계엄보통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구형은15년). 周永福국방부장관은 그달 18일 관할관의 형량확인과정에서 징역 7년으로 감형시켰고 鄭피고인은 항소를 포기, 형이 확정되었다. 鄭씨는 군 교도소의 독방에서 일반 사병 죄수와 꼭 같은 대우를 받으며 지냈다고 한다. 1980년 6월10일 鄭씨는 옥살이 6개월만에 형집행 정지로 석방되었다. 옥중에서 몸무게가 9kg이 줄어 출옥할때는 59kg이었다. 다음해 3월에는 사면·복권되었다. 3남1녀를 둔 鄭씨의 막내아들(29세)은 지금 육군대위로서 최전방에서 근무하고 있다. 鄭씨가 출옥한 해에 이 아들은 육군사관학교에 재학중이었다.
鄭씨는 아들에게 『괴로우면 퇴교하라』고 권고했으나 아들은 군인의 길을 계속 걷겠다고 하더란 것이다. 나머지 두 아들과 한 사위는 미국에서 살고 있다. 의외로 편한 얼굴을 하고 있는 鄭씨는 『감옥을 나온 뒤 인생을 많이 배우며 살고 있다. 다행히 우리 가정이 화목하여 나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동사무소, 전화국 등 민원창구를 직접 출입하면서 주민증도 떼 보고 전화신청도 했다. 아들뻘되는 전화국 공무원에게 반말을 들은 적도 있다고 한다. 운전면허도 새로 내 로얄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친구들과 군의 선·후배들도 자주 만나지만 국립묘지 등 공식적인 모임이나 장소에는 잘 가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 12·12때 수령사령관 張泰玩씨(56)는 1980년에 예편당한 뒤 한국증권전산(주) 사장으로 근무하고 있으나 12·12 때 팔에 총상을 입은 당시 특전사령관 鄭炳宙씨는 아무런 직책도 맡지 않고 야인으로 지내고 있다.
연금 못 받은 군인 32년
12·12 뒤 일부에서는 鄭昇和씨가 무능한 군 지휘관이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이 말에 가장 심하게 반발한 이들은 6·25때 鄭昇和씨를 부하(대대장 혹은 부연대장급)로 썼던 퇴역장성들이었다. 柳陽洙씨(동아그룹 부회장)는 『전투중 어려운 임무는 鄭昇和씨에게 맡기곤 했는데 한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고 했다. 6·25때 8연대의 부대대장이던 鄭대위는 초전의 대혼란 속에서도 자신의 대대를 체계있게 지휘, 장비와 인원을 고스란히 보존하여 광나루에서 도강, 전사에도 기록돼 있다. 6·25 중에는 공비토벌로 이름을 날렸던 그는 6·25 중에는 유명한 백골부대의 대대장으로서 낙동강 전선에서 두만강까지를 누비며 수십번이나 사선을 넘었다.
그는 훈장없는 장교로 유명했다. 『훈장을 타 가라는 증서를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다가 비에 젖었기에 다 찢어 버렸다』고 한다. 鄭씨는 자기 자랑에는 좀 서툰 인상을 준다. 기자가 일부러 자랑거리를 찾아 물어도 계면쩍어 하고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다만 『명령없이 진지를 포기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는 자랑을 했다. 그는 『전쟁을 해보면 평소에 얌전하고 내성적인 사람이 용감하고 평소에 목에 힘주고 다니는 사람들은 도망가기 바쁘더라』면서 『정치장교들이 전장에서 과연 소용이 있을까』라고 했다. 金昌龍, 元容德 등 이 나라의 유명한 정치장교들이 한결같이 전선을 피해 후방에서 권부의 주변만 맴돈 사실을 예로 들기도 했다.
鄭장군은 부군단장 시절 군단장인 韓信장군과 함께 휴전선의 철책을 고안한 업적으로도 알려져 있다. 鄭씨는 자기 자랑 대신『내가 모셨던 상관들―韓信 임충식(任忠植) 金鍾五장군 등이 모두 잘 된 것이 자랑스럽다』고 말하곤 한다. 1947년부터 시작된 그의 군생활은 1979년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러나 파란만장했던 군생활 만32년(전시3년 포함)에 대한 연금혜택을 그는 받지 못하고 있다. 실형선고를 받아 군적에서 삭제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李희성, 尹誠敏 국방부 장관시절에 『현행법상으로는 할 수 없으니 최대한 배려하여 3분의 1을 받도록 하겠다』는 연락이 왔으나 그는 거절했다고 한다. 鄭昇和씨의 사진은 지금 자신이 지휘관으로 근무했던 부대에서조차 제거되고 없다고 한다. 『내가 육군참모총장 시절에는 張都暎장군의 사진도 떼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순수군인이 많다
그래도 그는 기자와 헤어질 때 군인옹호론을 열심히 폈다.
『저는 국민과 군인 사이가 벌어지고 있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픕니다. 민주화가 이루어지면 이 관계도 개선되겠지요. 저는 일부 정치군인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이고 대다수 군인들은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북괴가 남침하지 못하는 것은 정치장교 때문이 아닙니다. 그래도 순수군인들이 대다수이기 때문입니다. 국민과 군의 친선관계는 남북통일 이후에까지도 반드시 지켜져야 할 관계입니다. 통일이 된 뒤에도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해가려면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해야 하니까요.
장교의 신분에 대한 국민들의 이해도 필요합니다. 장교는 다른 직업과는 달리 그의 평생을, 그리고 유사시에는 그의 생명을 국가에 담보한 사람들입니다. 제대한 뒤에도 예비역으로 남아 전쟁이 터지면 국가는 그들의 봉사를 다시 요구하게 됩니다. 장교가 무조건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대신에 국가는 그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군도 사회를 알고 사회도 군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군이 국민을 지배하겠다는 환상을 버려야 합니다. 군은 국민 품에 안길 때 편안합니다. 지난 6월 사태 때 우리 군이 취한 태도에서 그런 희망을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