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司馬懿, 179년~251년)는 중국 삼국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략가이며, 그의 손자 사마염이 세운 진나라의 기초를 세운 인물이다. 자는 중달(仲達)이며, 묘호는 고조(高祖), 시호는 선황제(宣皇帝)이다.
선황제(宣皇帝)는 휘(諱)가 의(懿), 자(字)는 중달(仲達)이고 하내군(河內郡) 온현(溫縣) 효경리(孝敬里) 사람으로 성(姓)은 사마(司馬) 씨다. 그의 선조는 제(帝) 고양(高陽)(전욱 고양씨)의 아들인 중려(重黎)로부터 나왔으며 (중려는) 즉 하관(夏官) 축융(祝融)이다.
※ 사마천 [사기] <초 세가>에 의하면 중려(重黎)는 전욱(顓頊) 고양(高陽)의 증손자인데, 제곡(帝嚳) 고신(高辛) 때에 화정(火正)으로 임명되어 천하를 밝혔으므로 축융(祝融)으로 불리었다 합니다. 참고로 [사기]의 설에 따른 삼황오제의 ‘오제’는 황제(黃帝) 헌원, 전욱 고양씨, 제곡 고신씨, 요, 순…입니다.
당(唐-요임금), 우(虞-순임금), 하(夏)나라, 상(商)나라 때를 거치며 대를 이어 그 직책을 세습했고, 주(周)나라 때에 이르러 하관(夏官)을 사마(司馬)로 바꾸었다. 그 뒤 정백휴보(程伯休父)가 주(周) 선왕(宣王) 때 서방(徐方-서이徐夷)을 평정하니 관족(官族)이 되어 (사마司馬를) 씨(氏)로 삼았다.
초(楚), 한(漢) 사이에(진한 교체기) 사마앙(司馬卬)은 조나라 장수(趙將)가 되어 제후들과 함께 진(秦)나라를 토벌했고, 진(秦)나라가 망하자 은왕(殷王)으로 세워져 하내(河內)에 도읍했다. 한나라가 그 땅에 군(郡)을 설치하니 자손들이 마침내 (그곳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사마앙으로부터 8세(世-대) 뒤 정서장군(征西將軍) 사마균(司馬鈞)을 낳으니 자(字)는 숙평(叔平)이다. 사마균이 예장태수(豫章太守) 사마량(司馬量)을 낳으니 자는 공탁(公度)이다. 사마량이 영천태수(潁川太守) 사마준(司馬儁)을 낳으니 자는 원이(元異)이다. 사마준이 경조윤(京兆尹) 사마방(司馬防)을 낳으니 자는 건공(建公)이다. 선제(宣帝)는 즉 사마방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기절(奇節-빼어난 절조)을 갖추고 총랑(聰朗-총명)하며 많은 대략(大略-원대한 지략)을 지녔고, 박학흡문(博學洽聞-학문에 박식하고 널리 들어 많이 앎.박학다식)하고 유교(儒教)를 복응(伏膺-가슴에 간직함;마음을 기울여 흠모함)했다. 한나라 말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항상 개연(慨然)해 하며 천하를 근심하는 마음을 품었다.
같은 군(郡) 사람인 남양태수(南陽太守) 양준(楊俊)이 [1] 사람을 잘 알아보기로 유명했는데 약관(弱冠)의 나이에 이르기 전인 선제(宣帝)를 만나보고는 비상한 그릇(非常之器)이라 말했다. 청하(淸河) 사람인 상서(尙書) 최염(崔琰)은 선제의 형인 사마랑(司馬朗)과 서로 친했는데 또한 사마랑에게 이르길, “그대의 동생은 총명하고 성실하며 강단(剛斷)이 있고 영특하니 다른 사람들이 그에 미치지 못하오.”라고 하였다.
[1] 본문 중 <南陽太守同郡楊俊>에 관한 교감기 - 남양(南陽)은 각 본에서는 모두 남군(南郡)으로 적혀 있다. 전대흔(錢大昕)이 입이사고이(廿二史考異)[이하 고이考異로 간칭(약칭)]에서 이르길, “위지(魏志)(삼국지 권23 양준전)에서 양준이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었다 하고 남군(南郡)이 아니다.”고 했다. 이제 이에 근거해 (남군을 남양으로) 고친다. (※ 남군 → 남양)
한나라 건안 6년(201년), 군(郡)에서 상계연(上計掾)으로 천거했다. (당시) 위무제(魏武帝-조조)는 사공(司空)이었는데 그에 관해 듣고는 선제를 벽소(辟召)하려 했다. 선제는 한나라의 명운이 바야흐로 쇠미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조씨(曹氏)에게 절의를 굽히지 않으려 하니 풍비(風痹-관절통) 때문에 기거(起居)할 수 없다며 이를 사양했다. 위무제는 사람을 시켜 밤중에 몰래 선제를 엿보게 했는데 선제는 꼿꼿이 누워 움직이지 않았다.
위무제가 승상이 되자 (※조조가 승상이 된 것은 208년의 일) 다시 벽소해 문학연(文學掾)으로 삼고는 (명을 받들어) 떠나는 자(行者)에게 다음과 같이 명했다, “만약 다시 반환(盤桓-결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림)한다면 곧바로 잡아 가두도록 하라.” 선제가 두려워하며 그 직에 취임했다. 그리하여 선제로 하여금 늘 태자(太子)와 함께 유처(游處-출입기거;교제, 교유)하게 하였고, 황문시랑(黃門侍郞)으로 올렸다가 의랑(議郞), 승상 동조속(丞相東曹屬)으로 전임시키고 뒤이어 주부(主簿)로 전임시켰다.
장로(張魯) 정벌에 종군했을 때 위무제에게 말했다. (※ 조조의 장로공격은 215년의 일)
“유비(劉備)는 속임수와 무력으로 유장(劉璋)을 붙잡아 촉인(蜀人)들이 아직 귀부하지 않았는데 멀리서 강릉(江陵)을 다투고 있으니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이제 만약 한중(漢中)에서 위엄을 떨친다면 익주가 진동할 것이고 진병하여 임한다면 사세상 필시 와해될 것입니다. 이러한 형세에 의거한다면 공력(功力)을 이루기는 쉽습니다. 성인(聖人)은 천시를 거스르지 않고 또한 놓치지도 않습니다.”
위무제가 이르길, “사람의 고통은 만족하지 못하는데 있다고 하더니, 이미 농우(隴右)를 얻었는데 또 다시 촉을 얻기를 바라는구나!”라 하며 그 말에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손권(孫權) 토벌에 종군하여 이를 격파했다. (※ 216년 겨울~217년 봄 사이의 손권 공격과 유수구 전투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임)
군이 돌아오자 손권이 사신을 보내 항복을 청하니 표를 올려 칭신(稱臣)하고 천명(天命)에 관해 진술했다. 위무제가 이르길 “이 아이가 나를 화로 위에 앉히려 하는구나!”라 하니 (선제가) 대답했다.
“한나라의 운수가 거의 끝나 전하(殿下)께서 천하의 10분의 9를 차지하여 천자를 섬기고 있습니다. 손권이 칭신(稱臣)한 것은 하늘과 사람의 뜻입니다. 우(虞), 하(夏), 은(殷), 주(周)가 겸양(謙讓)하지 않은 것은 하늘을 두려워하고 천명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위국(魏國)이 세워진 뒤 태자 중서자(太子中庶子)로 승진했다. (※ 조조의 위공 즉위는 213년 5월 ; 위왕 즉위는 216년 5월 ; 조비가 태자가 된 것은 217년 10월)
늘 중대한 모의(大謀)에 참여하여 매번 기책(奇策)을 내어놓아 태자에게 중한 신임을 얻으니, 진군(陳群), 오질(吳質), 주삭(朱鑠)과 함께 4우(四友)라 불리었다.
승진하여 군사마(軍司馬)가 되자 위무제에게 말했다,
“옛날 기자(箕子)가 모책을 진술하며 이르길 먹을 것이 그 으뜸이라 했습니다. 지금 천하에 농사짓지 않는 자가 대략 20여 만 명에 이르니 이는 나라를 다스리는 원대한 방책(經國遠籌)이 아닙니다. 비록 융갑(戎甲)을 벗진 않더라도(or 비록 전란이 아직 평정되지 않았지만) 의당 스스로 농사지으며 둔수해야 합니다.”
위무제가 이를 받아들이니 이로써 농사에 힘쓰고 곡식을 비축해 국용(國用)이 넉넉해졌다.
선제가 또 이르길, 형주자사(荊州刺史) 호수(胡脩)는 거칠고 난폭하고 남향태수(南鄕太守) 부방(傅方)은 교만, 사치스러워 둘 다 변경에 두어서는 안된다고 했으나 위무제가 이를 살피지 않았다. 촉장(蜀將) 관우(關羽)가 번(樊)에서 조인(曹仁)을 포위하고 우금(于禁) 등 7군(七軍)이 모두 패몰하자 호수, 부방은 과연 관우에게 항복하니 조인이 포위당한 일이 더욱 위급해졌다.
당시 한나라 황제가 허창에 도읍하고 있었는데 위무제는 적(賊)이 가깝다 하여 하북(河北)으로 천도(遷都)하고자 했다. 선제가 간언했다,
“우금 등이 수몰당한 것은 전수(戰守-나아가 싸우거나 물러나서 지킴)하다 실책한 것이 아니며 국가 대계(大計)에 손실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천도한다면 적(敵)에게 약함을 보이는 것이며 또한 회수(淮水), 면수(沔水) 인근의 백성들을 크게 불안하게 할 것입니다. 손권, 유비가 겉으로는 친하나 안으로는 소원하니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을 손권이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손권이 할 바를 깨우쳐주어 그로 하여금 관우의 배후를 기각(掎角–협공하거나 견제함)하게 하면(掎) 번(樊)의 포위는 절로 풀릴 것입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손권은 과연 장수 여몽(呂蒙)을 서쪽으로 보내 공안(公安)을 기습하여 함락했고 관우는 마침내 여몽에게 붙잡혔다.
위무제는 형주의 남은 백성과 영천(潁川)에서 둔전하던 자들이 남쪽 도적(南寇-오나라)에 핍근(逼近)하다 하여 [2] 이들을 모두 옮기려 했다. 선제가 말했다,
“형초(荊楚) 사람들은 경탈(輕脫-경망,경박)하여 동요시키기는 쉬우나 안정시키기는 어렵습니다. 관우가 이제 막 격파되어 악행을 저지른 많은 이들은 몸을 숨기고 관망하고 있는데, 이제 착한 이들을 옮긴다면 그들의 뜻을 상하게 할 뿐만 아니라 장차 떠난 자들이 감히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2] <屯田在潁川者逼近南寇> - 장증(張熷)의 독사거정(讀史擧正)(이하 거정擧正으로 간칭)에서 이르길 “남구(南寇)는 오나라를 일컬으니 영천(潁川)은 이에 가깝지 않다. 자치통감(이하 통감으로 간칭)에는 漢川(한천)이라 적혀 있는데 이것이 옳다.”고 했다.
(위무제가) 이에 따랐다. 그 후 도망한 자들이 모두 돌아와 생업에 종사했다.
위무제가 낙양(洛陽)에서 훙(薨)하자 (※ 조조의 죽음은 220년의 일) 조야(朝野)가 놀라고 두려워했는데, 선제가 장례 치르는 일을 다스리자 안팎이 숙연해졌다. 그리하여 재궁(梓宮-임금의 관)을 받들고 업(鄴)으로 돌아왔다.
위문제(魏文帝-조비)가 즉위하자 하진정후(河津亭侯)에 봉해지고 승상 장사(丞相長史)로 전임되었다. 때마침 손권이 군사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진군하자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번(樊), 양양(襄陽)에는 곡식이 없어 적을 막을 수 없다 하며 당시 조인(曹仁)이 양양을 진수하고 있었는데 조인을 불러 완(宛)으로 돌아오게 하도록 청했다. 선제가 말했다,
“손권은 이제 막 관우를 격파하여 지금은 그들이 스스로 (우리와) 결탁하려 할 때이니 필시 감히 우환을 끼치지는(침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양양은 수륙(水陸)의 요충이며 적을 막는 요해(要害)이니 이곳을 버려서는 안됩니다.”
그 말을 결국 따르지 않았다. 조인이 마침내 두 성(번,양양)을 불태운 후 버렸는데 손권은 과연 침범하지 않았고 위문제가 이를 후회했다.
위(魏)가 한나라의 선양을 받자 선제는 상서(尙書)로 임명되었다. 얼마 뒤 독군(督軍), 어사중승(御史中丞)으로 전임되고 안국향후(安國鄕侯)에 봉해졌다.
황초(黃初) 2년(221년), 독군(督軍)의 관직을 파하고 시중(侍中),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올렸다.
황초 5년(224년), 천자가 남쪽을 순행해 오(吳)와의 국경지방에서 관병(觀兵)했다. 선제는 허창에 남아 진수했는데, 상향후(向鄕侯)로 고쳐 봉해지고 무군(撫軍), 가절(假節)로 전임되어 5천 군사를 거느리게 되었고 급사중(給事中), 녹상서사(錄尙書事)의 직이 더해졌다. 선제가 굳게 사양하자 천자가 말했다,
“내가 서사(庶事-제반 정무)를 보며 밤낮으로 이어 잠시라도 편히 쉴 틈이 없소. 이는 (그대에게) 영예를 내리려는 것이 아니라 걱정거리를 나누려는 것일 뿐이오.”
황초 6년(225년), 천자가 다시 주사(舟師-수군)를 크게 일으켜 오(吳)를 정벌했는데, 다시 선제에게 명하길 거수(居守-머물며 지킴)하며 안으로는 백성들을 진무하고 밖으로는 군자(軍資-군수물자)를 공급하도록 했다. 출발할 무렵 조서를 내렸다,
“내가 후방의 일을 깊이 걱정하니 이 때문에 이를 경에게 맡기노라. 조참(曹參)이 비록 전공(戰功)을 세웠으나 소하(蕭何)도 또한 중요하도다. 나로 하여금 서쪽을 돌아보는 걱정이 없게 하니 이 또한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천자가 광릉(廣陵)으로부터 낙양(洛陽)으로 돌아오며 선제에게 조서를 내렸다,
“내가 동쪽에 있을 때는 무군(撫軍-관직으로 사람을 호칭하는 것으로 여기선 사마의를 가리킴)은 응당 서쪽의 일을 총괄하고, 내가 서쪽에 있을 때는 무군(撫軍)은 응당 동쪽의 일을 총괄하도록 하라.”
이에 선제는 허창(許昌)에 머물며 진수했다.
천자의 병이 깊어지자 선제는 조진(曹眞), 진군(陳群) 등과 더불어 숭화전(崇華殿)의 남당(南堂)에서 보정(輔政)하라는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을 함께 받았다. 태자(太子)에게 조령을 내렸다, “이 세 명의 공들과 틈이 생기더라도 결코 의심하지 말라.”
명제(明帝-조예)가 즉위하자 무양후(舞陽侯)로 고쳐 봉해졌다.
손권이 강하(江夏)를 포위하고 그의 장수인 제갈근(諸葛瑾), 장패(張霸)를 보내 아울러 양양을 공격하자 선제가 제군(諸軍)을 지휘해 손권을 쳐서 패주시켰다. 진격해 제갈근을 격파하고 장패를 참수하고 아울러 천여 급을 참수했다.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승진했다. (※ 조비의 죽음과 손권의 공격은 모두 226년의 일)
태화(太和) 원년(227년) 6월, 천자가 조령을 내려 선제를 완(宛)에 주둔케 하고 독형예이주제군사(督荊豫二州諸軍事-형주,예주의 2주 군무를 도독한다는 의미)의 직을 더했다.
당초 촉장(蜀將) 맹달(孟達)이 항복하자 위나라 조정에서는 그를 매우 후대했었다. 선제는 맹달의 언행이 간교하여 신임할 수 없다고 누차 간언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도리어 맹달을 영(領-겸직의 의미) 신성태수(新城太守)로 삼고 후(侯)에 봉하고 가절(假節)했다. 그리하여 맹달은 오(吳)와 연결하고 촉(蜀)과 관계를 공고히 해 은밀히 중국(中國-위나라를 가리킴)을 도모하려 했다.
촉상(蜀相) 제갈량(諸葛亮)은 그가 반복(反覆-언행을 이리저리 고침)하는 것을 증오하고 또한 그가 화를 일으킬까 염려했다. 맹달은 위흥태수(魏興太守) 신의(申儀)와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제갈량은 맹달의 거사를 재촉하고자 하여 곽모(郭模)를 보내 거짓으로 항복하게 하니 신의(申儀)를 방문하여 그 계획을 누설시켰다. 맹달은 그의 계획이 누설되었다는 말을 듣고 장차 거병하려 했다. 선제는 맹달이 신속하게 군사를 일으킬까 두려워하여 서신을 보내 그를 효유했다.
“장군이 지난 날 유비(劉備)를 버리고 국가에 몸을 의탁하자 국가에서는 장군에게 변경의 중임을 맡겨 촉(蜀)을 도모하도록 했으니 가히 심관백일(心貫白日)이라 이를 만하오. 촉인(蜀人)들은 어리석거나 지혜로운 자를 막론하고 장군을 절치(切齒-이를 갈며 증오함)하지 않는 자가 없소. 제갈량은 우리를 서로 싸우게 하고 싶었으나 오직 방법이 없어 고심할 뿐이었소. 곽모가 한 말이 작은 일이 아닌데 제갈량이 어찌 경솔하게 누설되게 했겠소. 이는 쉽게 알 수 있는 일이오.”
맹달은 서신을 받고 크게 기뻐하고, 거병을 망설이며 결단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선제가 은밀히 군을 일으켜 공격했다. 제장(諸將)들은 맹달이 두 적(賊)과 결탁되어 있으므로 의당 관망한 뒤에 움직여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맹달은 신의(信義)가 없고 지금은 그들이 서로 의심하는 때이니, 응당 결단하지 못하는 때를 틈타 속히 해결해야 하오.”
그리고는 배도겸행(倍道兼行-이틀 길을 하루에 걸음,신속히 행군함)하여 8일 만에 성 아래에 도착했다. 오(吳)와 촉(蜀)이 각기 그들의 장수를 보내 서성(西城) 안교(安橋)와 목란새(木闌塞)로 향하게 하여 맹달을 구원하자 선제는 제장들을 나누어 보내 이를 막았다.
※ 곽모와 신의의 대화 / [전략]戰略
맹달이 촉병 수 백을 거느리고 위나라에 항복하자 위문제는 맹달을 신성태수로 삼았다. 태화 원년, 제갈량이 성도로부터 한중에 도착하자 맹달이 또한 제갈량에 호응하고자 하여 제갈량에게 옥결(玉玦), 직성장즙(織成鄣汁), 소합향(蘇合香)을 선물로 보냈다. 제갈량은 곽모(郭摸)에게 거짓항복하여 위나라로 가게 했다. 위흥태수 신의(申儀)는 맹달과의 사이에 불화가 있었는데 곽모가 신의에게 말했다, “옥결(玉玦)은 모책이 이미 결정되었다(謀已決)는 말이고, 직성(織成)은 모책이 이미 이루어졌다(謀已成)는 말이고, 소합향(蘇合香)은 일이 이미 합해졌다(事已合)는 말입니다.”
당초 맹달이 제갈량에게 서신을 보내 말했다,
“완(宛)은 낙양과 800리 떨어져 있고 내가 있는 곳과는 1,200리 떨어져 있으니, 내가 거사했다는 말을 들으면 응당 천자에게 표를 올리며 서로 왕복해야 하니 한 달은 걸릴 것인 즉, 내 성(城)은 이미 견고해지고 제군(諸軍)은 충분히 대비되어 있을 것입니다. 또한 내가 있는 곳은 깊고 험한 곳이라 사마공(司馬公)이 필시 직접 오지는 않을 것인데, 제장(諸將)들이 온다면 내가 걱정할 일은 없습니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하자 맹달이 또 제갈량에게 고했다,
“내가 거사한 지 8일 만에 군대가 성 아래에 도착하니 어찌 그토록 신속(神速)할 수 있습니까!”
상용성(上庸城)의 3면은 물에 의지했는데 맹달은 성 바깥에 목책(木柵)을 세워 스스로 굳게 방비했다.
[3] 선제는 물을 건너 그 목책을 깨뜨리고 곧바로 성 아래에 이르렀다. 여덟 갈래 길로 성을 공격하여 16일 만에(旬有六日) 맹달의 생질(甥)인 등현(鄧賢)과 장수 이보(李輔) 등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맹달을 참수하고 그 수급을 경사(京師-수도)로 보냈다. 1만여 명을 포로로 잡아 진려(振旅-군대를 거두어 개선함)하여 완(宛)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농잠(農桑-농사와 양잠)을 권하고 부비(浮費-불필요한 지출)를 금하니 남쪽 사람들이 기뻐하며 귀부했다.
당초 신의(申儀)는 오랫동안 위흥(魏興)에 있으면서 변경지역에서 전횡하니 번번이 승제(承制-임금의 뜻을 받들어 그 권한을 편의로 행사함)하여 인장을 새겼으나 대다수가 가수(假授-비정식 위임)한 것이었는데, 맹달이 주살되자 스스로 의심하는 마음을 품게 되었다. 이 무렵 여러 군수(郡守)들이 선제가 새로 승리했다 하여 예물을 바치며 축하하자 이를 모두 받았다. 선제는 사람을 시켜 신의에게 (하례하러 직접 오도록) 권유하고, 신의가 도착하자 승제(承制)한 정황을 심문하고는 그를 체포해 경사(京師)로 송환했다. 또한 맹달의 남은 무리 7천여 가(家)를 유주(幽州)로 옮겼다.
이 무렵 변군(邊郡)이 새로 귀부하여 호적에서 누락된 호구가 많으니 위(魏) 조정에서 은실(隱實-실태조사)하려 했다. 선제를 경사(京師)로 오도록 하여 천자가 이 일에 관해 선제에게 자문을 구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적(賊)이 밀강(密網-촘촘한 그물,엄격한 법률을 비유)으로 아랫사람들을 속박하니 이 때문에 아랫사람들이 그를 저버린 것입니다. 의당 너그러이 대강(大綱)으로 다스리면 자연히 안거하며 즐거이 생업에 종사할 것입니다.”
또한 두 적을 의당 토벌해야 하는데 누구를 우선해야 하는지 물으니 선제가 대답했다.
“오(吳)는 중국(中國)이 수전(水戰-물싸움)에 익숙지 못하다 여겨 감히 동관(東關-유수구 일대 관문)에 흩어져 거주하고 있습니다. 무릇 적을 공격할 때는 그들의 목구멍(喉)을 누르고 심장(心)을 찔러야 하는데, 하구(夏口), 동관(東關)이 바로 적의 심후(心喉)입니다. 만약 육군(陸軍)을 환성(皖城)으로 향하게 해 손권을 동쪽으로 유인한 뒤 수전군(水戰軍)을 하구(夏口)로 향하게 해 그들의 헛점을 틈타 공격한다면 이는 신병(神兵)이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는 격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습니다.”
천자가 이를 모두 옳게 여겼고, 다시 선제에게 명해 완(宛)에 머물도록 했다.
태화 4년(230), 대장군(大將軍)으로 승진하고 대도독(大都督), 가황월(假黃鉞)이 더해지고 조진(曹眞)과 함께 촉(蜀)을 정벌했다. 선제는 서성(西城)에서부터 산의 나무를 베어내 길을 열고 물과 뭍으로 아울러 진격해 면수(沔水-한수)를 거슬러 올라가 구인(朐䏰)에 도착하고 신풍현(新豐縣)을 함락했다. 군(軍)이 단구(丹口)에 주둔하다 비를 만나 회군했다.
이듬해(231년), 제갈량(諸葛亮)이 천수(天水)를 침범하고 기산(祁山)에서 장군 가사(賈嗣), 위평(魏平)을 포위했다. 천자가 말했다, “서쪽에 일이 생기니 그대가 아니면 가히 맡길 만한 자가 없소.”
그리고는 선제를 서쪽으로 가서 장안(長安)에 주둔케 하고 옹주, 양주 2개 주의 군무를 도독하게 하니(都督雍梁二州諸軍事-도독옹량이주제군사) [4] 거기장군(車騎將軍) 장합(張郃), 후장군(後將軍) 비요(費曜), 정촉호군(征蜀護軍) 대릉(戴淩), 옹주자사(雍州刺史) 곽회(郭淮) 등을 거느리고 제갈량을 공격했다.
[4] <都督雍梁二州諸軍事> - 삼국지(三國志) 위지(이하 위지魏志나 촉지蜀志, 오지吳志로 약칭) 진류왕기(陳留王紀)에 의하면 梁州(양주)는 경원(景元) 4년(263년, 촉멸망 이후) 12월의 일로서 이때보다 30여 년 뒤의 일이다. 사마의가 2주를 도독하며 조진(曹眞)의 뒤를 이었고, 경초(景初) 3년(239년), 조엄(趙儼)이 사마의의 뒤를 이었는데, 위지 조진전, 조엄전에는 모두 雍涼(옹량)이라 적혀있다. 응당 위지에 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 都督雍梁二州諸軍事 → 都督雍涼二州諸軍事 로 보인다는 말 / 촉 멸망, 진 건국 이후 익주를 분할해 양주(梁州-진서 지리지에 의하면 한중, 익주, 재동, 파군 등), 영주(寧州-운남, 건녕, 영창 등)가 설치됨.)
합이 선제에게 권하길 군대를 나누어 옹(雍), 미(郿)에 주둔시켜 후진(後鎭)으로 삼자고 하자 선제가 말했다,
“전군(前軍)이 단독으로 적을 감당할 수 있다 헤아린다면 장군의 말이 옳소. 만약 능히 감당하지 못하면서 군을 앞뒤로 나눈다면 이는 즉 초(楚)나라 삼군(三軍)이 경포(黥布)에게 격파당한 원인이었소.” (※)
※ [사기] <경포열전>에 의하면, 한신, 팽월 등 공신들이 차례로 제거되는 데 위협을 느낀 회남왕 경포가 반란을 일으켜 회수를 건너 초나라(당시 하비에 도읍)에 쳐들어갑니다. 이때 초왕 유교가 이를 요격하고 요격군을 지휘하던 초나라 장수는 군을 셋으로 나누어 서로 돕는 형세의 포진으로 대항했으나, 경포가 한 갈래 군을 깨뜨리자 나머지 두 군이 모두 흩어져 달아나 초군이 궤멸됨.
그리고는 유미(隃麋)로 진군했다. 제갈량은 대군(大軍)이 곧 도착한다는 말을 듣고는 스스로 뭇 장수들을 이끌고 상규(上邽)의 보리를 수확했다. (※) 제장들이 모두 이를 두려워하자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생각이 많고 결단력이 부족하니(慮多決少) 필시 영채를 안돈하여 스스로 방비를 굳게 한 뒤에야 보리를 수확할 것이오. 우리가 이틀 동안 급히 행군하면(兼行) 충분하오.”
그리고는 갑옷을 벗고(卷甲) 밤낮으로 달려가니, 제갈량은 멀리서 먼지가 이는 것을 보고 달아났다. 선제가 말했다,
“우리가 급히 행군해(倍道) 피로하나 이는 용병에 밝은 자라면 바라는 바요. 제갈량이 감히 위수(渭水)를 점거하지 못하니 이는 다루기 쉽소.”
진군하여 한양(漢陽)에 주둔했는데 제갈량과 서로 조우하자 진을 치고 맞이했다. 장수 우금(牛金)을 보내 경기(輕騎-경기병)로 유인했는데 군사들이 막 접전했을 때 제갈량이 퇴각하니 이를 추격해 기산(祁山)에 이르렀다. 제갈량은 노성(鹵城)에 주둔하여 남북의 두 산을 점거하고 물을 끊고 두텁게 포위했다.(斷水爲重圍) 선제가 포위망을(or 위圍를) 공격해 함락하자(攻拔其圍) 제갈량이 밤을 틈타 달아나니 이를 추격, 격파해 1만을 헤아리는 적군을 부참(俘斬-사로잡거나 죽임.참획)했다. 천자가 사자를 보내 군의 노고를 위로하고 봉읍(封邑)을 늘려주었다.
※ 상규의 보리 / [삼국지] 명제기, 명제기 주 [위서]魏書
(태화 5년=231년) 가을 7월 병자일(6일), 제갈량이 퇴주하자 (공이 있는 자들에게) 각기 차등을 두어 봉작하고 관위를 더해주었다.[1]
[1] 위서 왈 – 당초 제갈량이 출군했을 때 의논하는 자들이 이르길, 제갈량군에 치중이 없어 군량이 필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니 공격하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것이어서 군사들을 수고롭게 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 또 어떤 이는 상규 주변의 보리(生麥)를 (미리) 베어 적의 식량을 없애자고 했는데 황제가 이를 모두 들어주지 않았다. 그 앞뒤로 군사를 보내어 선왕(宣王-사마의)의 군을 늘려주었고 또한 보리를 지키도록 명했다. 선왕은 제갈량과 서로 맞서며 이 보리를 얻어 군량으로 삼았다.
이 무렵 군사(軍師) 두습(杜襲), 독군(督軍) 설제(薛悌)가 모두 말하길, 내년에 보리가 익으면 제갈량이 필시 침범할 것인데 농우(隴右-농서)에 곡식이 없으니 의당 겨울 동안에 미리 옮겨놓아야 한다고 했다.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은 기산(祁山)으로 두 번 출병하고 진창을 한 번 공격했다 꺾이고 돌아갔소. 설령 그가 뒤에 출병하더라도 다시 공성(攻城)하지는 않고 응당 야전(野戰)을 바랄 것이며, 필시 농동(隴東)에서일 것이고 농서(隴西)는 아닐 것이오. 제갈량은 늘 군량이 부족한 것을 한스러워 했으니 돌아가서는 필시 곡식을 비축할 것이라 내가 헤아려보건대 3년 안에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오.”
이에 표를 올려 기주(冀州)의 농부(農夫)를 옮겨 상규(上邽)를 경작하게 하고 경조(京兆), 천수(天水), 남안(南安)의 감야(監冶-대장장이 감독)를 흥성하게 했다.
청룡(靑龍) 원년(233년), 성국거(成國渠)를 뚫고 임진피(臨晉陂)를 쌓아 수천 경(頃)의 농지에 물을 대니 나라가 충실해졌다.
청룡 2년(234), 제갈량이 다시 군사 10여 만을 이끌고 야곡(斜谷)을 나와 미(郿) 땅의 위수(渭水) 남쪽 평원에 영루를 세웠다. 천자가 이를 우려하여 정촉호군(征蜀護軍) 진랑(秦朗)을 보내 보기(步騎-보병과 기병) 2만을 이끌고 가서 선제의 절도(節度-지휘,명령)를 받게 했다.
제장(諸將)들이 위수 북쪽에 주둔하며 적에 맞서려 하자 선제가 말했다, “백성들이 모두 위수 남쪽에 모여 거주하니 이 곳이 필히 다투어야 할 땅이오.”
그리고는 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 물을 뒤로 한 채 영루를 세웠다. 그리고는 제장들에게 말했다, “제갈량이 만약 용감한 자라면 응당 무공(武功)을 나와 산을 따라 동진할 것이오. 만약 서쪽으로 가서 오장원(五丈原)에 오른다면 제군(諸軍)이 무사(無事)할 것이오.”
제갈량은 과연 오장원에 오르고 장차 북쪽으로 위수를 건너려 했는데, 선제는 장군 주당(周當)을 보내 양수(陽遂)에 주둔케 하여 적을 유인했다. 며칠 동안 제갈량이 움직이지 않으니 선제가 말했다, “제갈량이 평원을 다투고 싶어하면서도 양수(陽遂)로 향하지 않으니 이 뜻을 가히 알만하오.”
장군 호준(胡遵), 옹주자사 곽회(郭淮)를 보내 함께 양수(陽遂)를 방비하게 하니 적석(積石)에서 제갈량과 조우했다. 평원에서 싸웠는데 제갈량이 진격할 수 없자 오장원으로 되돌아갔다. 때마침 장성(長星-혜성)이 제갈량의 영루로 떨어지자 선제는 제갈량이 반드시 패할 것임을 알고 기병(奇兵-기습군)을 보내 제갈량의 후방을 기각(掎角)하여 오백여 급을 참수하고 생구(生口-포로) 천여 명을 붙잡았으며 항복한 자가 6백여 명에 이르렀다.
당시 조정에서는 ‘제갈량이 군을 외지에 거주하게 하며(僑軍) 멀리 침범했으니(遠寇)
(※) (제갈량의 입장에선) 급히 싸우는 것이 이롭다’고 보아, 선제에게 늘 명하길 지중(持重)하며 그들의 변화를 살피라고 했다.
제갈량이 수차례 싸움을 걸었으나 선제가 출전하지 않으니 (제갈량은) 선제에게 건괵(巾幗-부녀자들이 쓰던 두건과 머리장식)과 부인들이 쓰는 장신구(婦人之飾)를 보냈다. 선제가 노하여 표를 올려 결전(決戰)할 것을 청하자 천자가 불허하고는 골경신(骨鯁臣-강직한 신하) 위위(衛尉) 신비(辛毗)를 보내 부절을 지니고 가서 군사(軍師)가 되어 이를 제지하게 했다. 그 뒤 제갈량이 다시 와서 싸움을 걸자 선제가 장차 출전하여 이에 응하려 했는데,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군문(軍門)에 서서 (막으니) 선제가 이에 그만두었다.
당초 촉장(蜀將) 강유(姜維)는 신비가 왔다는 말을 듣고 제갈량에게 이르길, “신비가 부절을 지니고 당도했으니 적(賊)이 다시는 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 하니 제갈량이 말했다,
“그는 본래 싸우려는 마음이 없는데 (천자에게 결전을) 굳게 청한 이유는 그의 군사들에게 무(武)를 과시하자는 것이오. 장수가 군중에 있으면 임금의 명도 받들지 않을 때가 있는데, 만약 저들이 우리를 능히 제압할 수 있다면 어찌 천리 길을 가서 굳이 결전을 청하겠소!”
※ 여기서 僑軍遠寇(교군원구)는 ‘멀리 침범해 와서 자국을 벗어나 위나라 영토에서 둔전하며 객지생활하는 원정군’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보입니다.
선제의 동생 사마부(司馬孚)가 서신을 보내 군사(軍事)에 관해 물었다. 선제가 답장을 보내 말했다,
“제갈량은 뜻이 크나 기회를 살피지 못하고(不見機), 꾀가 많으나 결단력이 부족하고, 용병을 좋아하나 임기응변이 없으니, 비록 10만 군사를 이끈다 한들 내 계획 속으로 빠져들 뿐이라 반드시 격파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대치한지 백여일 만에 때마침 제갈량이 병으로 죽자 (촉의) 제장들이 둔영을 불태우고 달아났고, 백성들이 급히 달려와 알려주니 선제가 출병해 이를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長史) 양의(楊儀)가 군기를 되돌리고 북을 치니 마치 선제와 맞서려는 듯 했다. 선제는 궁지에 몰린 적은 핍박해서는 안된다고 여기니 이에 양의는 결진(結陣)한 채 떠났다.
다음 날 제갈량의 영루(營壘)로 가서 그의 남은 흔적(遺事)을 살펴보고 그의 도서(圖書)와 양곡(糧穀)을 매우 많이 노획했다. 선제는 그가 필시 죽었음을 알아채고는 이르길, “천하의 기재(奇才)로구나”라 하였다. 신비(辛毗)는 (제갈량이 죽었는지) 아직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하였다. 선제가 말했다,
“군가에서 중히 여기는 것이 군서(軍書), 밀계(密計), 병마(兵馬-병졸과 군마)가 먹는 양곡(糧穀)인데, 이제 이들을 모두 내버렸으니 자신의 오장(五藏)을 (※) 내버린 자가 어찌 살아 있겠소? 의당 급히 추격해야 하오.”
관중(關中)에 질려(蒺藜-남가새;마름쇠)가 많다는 말을 듣고 선제는 군사 2천명에게 부드러운 목재로 된 바닥이 평평한 나무신을 신게 해 앞장서게 하고 질려가 모두 나무신에 박힌 뒤 마보(馬步-기병과 보병)가 함께 진격했다. 추격하여 적안(赤岸)에 도착한 뒤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당시 백성들이 이에 관해 속어(諺)를 지어 이르길, “죽은 제갈(諸葛)이 산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死諸葛走生仲達)고 하였다. 선제가 이를 듣고 웃으며 말했다, “나는 산 자를 헤아릴 수는 있으나 죽은 자를 헤아릴 수는 없기 때문에 그런 것이다.”
※ 앞의 군서, 밀계등과 연관되어 五라는 숫자에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오장육부할 때 오장처럼 ‘중요한 것’이라는 정도의 뜻으로 쓰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촉군이 퇴각하며 병마를 내버렸을 리는 없으므로 兵馬糧穀을 兵馬 / 糧穀으로 나누지 않고 ‘병마가 먹는 양곡’으로 풀었습니다.
그 이전에 제갈량의 사자가 도착했을 때 선제가 물었다, “제갈공(諸葛公)의 기거(起居-일상생활)가 어떠하고 음식은 얼마나 드시오?” (食可幾米) [5] 사자가 대답했다, “3-4 승(升)을 드십니다.” 이어 정사(政事)에 관해 물으니 대답했다, “스무 대 이상의 형벌은 모두 직접 챙기십니다.” 그 뒤 선제가 다른 이에게 말하길, “제갈공명이 어찌 오래 가겠는가!”라고 하였는데, 결국 그 말대로 되었다. 제갈량의 부장(部將)인 양의(楊儀)와 위연(魏延)이 권력을 다투니 양의가 위연을 참수하고 그의 군사를 아울렀다. 선제가 이를 틈타 진격하고자 했으나 조서를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5] <食可幾米> - 태평어람(太平御覽) (이하 어람御覽으로 약칭) 권378에서 위(魏) 명제(明帝)가 조식(曹植)에게 보낸 조서를 인용하여 “食幾許米(식기허미)”라 했으니 幾許(기허)가 즉 幾何(기하-얼마 만큼인가)라는 말이며 한나라, 위나라 때 보통 쓰던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幾 아래(뒤)에 응당 許 자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 食可幾米 → 食可幾許米…로 보인다는 말)
청룡 3년(235), 태위(太尉)로 올리고 봉읍(封邑)을 더욱 늘려주었다. 촉장(蜀將) 마대(馬岱)가 침범하니, 선제가 장군 우금(牛金)을 보내 이를 공격해 패주시키고 천여 급을 참수했다.
무도(武都) 저왕(氐王-저족의 왕) 부쌍(苻雙), 강단(强端)이 그들의 부속 6천여 명을 거느리고 와서 항복했다. [6]
[6] <武都氐王苻雙强端帥其屬六千餘人來降> - 촉지 장의전, 화양국지 권7 에서 (건흥 14년=236년) 무도 저왕 부건(苻健)이 촉에 항복했고 그의 동생은 무리를 이끌고 위나라로 갔다고 했다. 부쌍(苻雙)은 저왕(氐王)이 아니니 王 자는 연문(衍文-잘못 덧붙여진 군더더기 글자)으로 보인다. (※ 武都氐王苻雙→武都氐苻雙..으로 보인다는 말)
관동(關東)에 기근이 들어 선제는 장안(長安)의 곡식 5백만 곡(斛)을 경사(京師)로 보냈다.
청룡 4년(236), 흰 사슴(白鹿)을 잡아 헌상했다. 천자가 말했다,
“옛날 주공(周公) 단(旦)이 성왕(成王)을 보좌할 때 흰 꿩을 바친 일이 있다. 이제 그대가 섬서(陝西)에서 대임을 맡아 흰 사슴을 헌상하니, 충성(忠誠)이 서로 부합하여 천년이 한 마음으로 방가(邦家-국가)를 다스리는 것으로 어찌 길이 아름다운 일이 아니겠는가!”
요동태수(遼東太守) 공손문의(公孫文懿-공손연.※)가 모반하자 선제를 경사(京師)로 불렀다. 천자가 이르길, “이 일은 족히 그대를 수고시킬 일이 아니나 이 사안에서 반드시 이기고자 하여 이 때문에 그대를 번거롭게 했소. 그대가 헤아리기에 그가 어떤 계책을 쓸 것 같소?”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성을 버리고 미리 달아나는 것이 상계(上計-상책)입니다. 요수(遼水)에 의지해 대군(大軍)에 맞서는 것이 그 다음으로 좋은 계책(次計)입니다. (그러나) 만약 앉아서 양평(襄平)을 지키려 한다면 사로잡히게 될 뿐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그 계책 중에 장차 어떤 것을 쓸 것 같소?”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오직 현명한 자만이 능히 자신과 상대방(의 역량)을 깊이 헤아려 미리 포기할 수 있으나 이는 그가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외떨어진 군사로 멀리 정벌하면 (공손연은 우리가) 장차 오래 버틸 수 없으리라 여겨 필시 먼저 요수(遼水)에서 맞서고 그 뒤 (물러나 양평을) 지킬 것이니, 이는 중책과 하책입니다.”
천자가 이르길, “갔다가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겠소?”라 하자 선제가 대답했다,
“가는데 백일, 돌아오는데 백일, 공격하는데 백일이 걸리며 휴식하는데 60일을 잡으면 1년이면 족합니다.”
※ 당고조 이연李淵의 이름을 피휘하기 위해 공손연의 자(字)인 문의(文懿)로 표기한 것 같고, 이후로도 [진서]에서는 계속 공손연을 (공손)문의로 적고 있습니다.
당시 궁실(宮室)을 크게 수축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군려(軍旅-전쟁;군대)가 더해지니 백성들이 굶주리고 피폐해졌다. 선제는 장차 군대를 일으키려 하니 이에 다음과 같이 간언했다,
“옛날 주공(周公)이 낙읍(洛邑)을 영건(營建)하고 소하(蕭何)가 미앙(未央)(궁)을 지었으니 오늘날 궁실(宮室)이 미비한 것은 신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수 이북으로 백성들이 곤궁하고 안팎으로 노역이 많아 사세상 이들을 함께 병행할 수는 없으니, 의당 안의 일(內務→궁실 수축)은 잠시 그만두어 한 때의 위급함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경초(景初) 2년(238년) 우금(牛金), 호준(胡遵) 등과 보기(步騎) 4만을 이끌고 경도(京都-수도)를 출발했다. 거가(車駕-임금의 수레)가 이를 전송해 서명문(西明門)을 나왔고, 동생 사마부(司馬孚), 아들 사마사(司馬師)에게 명해 전송하며 온(溫)현을 지나게 하고 곡식과 비단, 소와 술(穀帛牛酒)을 하사하고 군수(郡守), 전농(典農)이하 모든 관원들에게 방문하도록 명했다. (고향인 온현에서) 부로(父老-노인)와 고구(故舊-옛 친구,지인)들을 만나 여러 날 동안 잔치를 열었다. 선제는 탄식(嘆息)하고 창연(悵然)해하다 감흥이 일자(有感) 노래(歌)를 읊었다.
“천지(天地)가 개벽(開闢)하여 해와 달이 다시 빛나는구나. 좋은 기회를 만나 힘을 다해 멀리 원정하노니. 장차 뭇 더러운 것들을 쓸어 없애고 돌아와 고향을 지나겠노라. 만리를 깨끗이 하고 팔황(八荒-온 세상)을 총제(總齊-통일)하리니. 공이 이루어진 것을 고한 뒤 귀로(歸老-관직을 사양하고 노인으로 여생을 보냄)해 무양(舞陽)에서 대죄(待罪)하겠노라.” (※ 당시 사마의는 무양후)
그리고는 진군하여 고죽(孤竹)을 지나고 갈석(碣石)을 넘어 요수(遼水)에 이르렀다. 문의(文懿-공손연)는 과연 보기(步騎) 수만 명을 보내 요수(遼隧)에 의지해 견벽(堅壁)한 채 수비하며 남북으로 6-70리에 걸쳐 선제에게 맞섰다. 선제가 대군을 결집해(盛兵) 많은 기치를 펼쳐 그들의 남쪽으로 출군하자 적(賊)이 정예병을 다하여(盡銳) 이를 향해 나와왔다. 그러자 배를 띄워 몰래 강을 건너 그들의 북쪽으로 출격하였고, 적(賊)의 둔영과 서로 가까워지자 배를 가라앉히고 다리를 불태운 뒤 요수(遼水) 가에서 길게 포위하고는(作長圍) 적(賊)을 내버려두고 양평(襄平)으로 향했다. 제장들이 말했다,
“적을 공격하지 않고 포위하기만 하니(作圍) 이는 군사들에게 보여줄 만한 좋은 방책이 아닙니다.”
선제가 말했다,
“적(賊)이 둔영을 견고히 하고 보루를 높이는 것은 우리 군사들을 피로하게 하려는 것이오. 적을 공격하면 그 계책에 곧바로 떨어지게 되니 이는 바로 왕읍(王邑)이 곤양(昆陽)에서 치욕을 당한 원인이었소. 옛 사람이 이르길, 적이 비록 보루를 높이고 있다 하더라도 부득불 나와 더불어 (성을 나와) 싸우게 되는 것은 반드시 그들이 구원해야 할 곳을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소. 적의 대군이 이곳에 있으니 즉 그 소굴(巢窟)은 비어 있을 것이오. 우리가 곧바로 양평(襄平)으로 향한다면 내심 두려움을 품을 것이고 두려움을 품으면 싸우러 나설 것이니 반드시 격파할 수 있소.”
그리고는 진(陣)을 정돈하여 나아갔다. 적(賊)은 선제의 군대가 그들의 배후로 출격하는 것을 보고 과연 이를 요격했다. 선제가 제장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둔영을 공격하지 않은 것은 바로 이렇게 되기를 바란 것이니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소.”
그리고는 군대를 풀어 역격(逆擊)하여 적을 대파하고 세 번 싸워 모두 이겼다. 적이 (물러나) 양평(襄平)에 의지하니 진군하여 이를 포위했다.
당초 문의(文懿-공손연)는 위나라 군대가 출격한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구원을 청했다. 손권이 또한 멀리 출병하여 그를 위해 성원(聲援)하고 문의(文懿)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마공(司馬公)은 용병에 능하고 변화(變化)가 신(神)과 같아 그가 향하는 곳에 앞을 가로막을 자가 없으니(所向無前) 동생(→공손연)이 심히 염려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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